새벽 배포와 자판기 음료수: 시니어 개발자가 팀장이 되어갈 때

새벽 배포와 자판기 음료수: 시니어 개발자가 팀장이 되어갈 때

오랜만에 새벽 일찍 알람을 맞추고 출근길에 나섰다. 월간 정기 배포가 있는 날이었다.

보통은 팀원들이 주도해서 진행하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배포 범위가 워낙 넓고 굵직한 아키텍처 변경 건들이 얽혀 있어 조금이나마 손을 보태고 싶었다. 사무실로 향할 때만 해도, 현업에서 치열하게 트러블슈팅을 주도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해 모니터 앞에 앉았을 때, 내가 마주한 것은 낯선 이질감이었다.

실무의 낯선 풍경, 그리고 소외감

배포 스크립트와 파이프라인은 내가 현업에서 한 발 물러선 사이 제법 많이 바뀌어 있었다. 모니터 속을 빠르게 지나가는 로그들과 명령어들은 이제 내 손때 묻은 도구가 아니었다.

더 크게 다가온 것은 코드와의 거리감이었다. 내가 직접 한 줄 한 줄 고민해서 짜지 않은 버전, 팀원들이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며 고도화해 온 코드가 배포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혹시 모를 이슈가 발생하더라도 예전처럼 곧바로 직관적인 원인을 찾아내고 기민하게 대처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팀원들의 등 뒤에서 서성이다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사무실 구석 자판기로 향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팀장이라는 자리가 원래 이런 걸까.’

차가운 캔 음료 몇 개를 뽑아 돌아와 팀원들 책상 위에 올려두는 내 모습이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새벽부터 나와 고생하는 이들에게 고작 자판기 음료수나 쥐여주는 정도의 역할밖에 못 한다는 사실이, 난 한 것도 별로 없는데 머리가 지끈거리는 이 비효율적인 피로감이 나를 작게 만들었다.

현장에서 밀려나 점점 중심에서 멀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트레이드오프 : 코드에서 멀어져 시스템을 보는 일

집으로 돌아와 멍하니 천장을 보며 어제의 새벽을 다시 짚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은 내가 무능해지거나 도태되는 과정이 아니라, 개발자에서 ‘팀장’이라는 리더로 나아갈 때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역할의 트레이드오프(Trade-off)라는 것을.

시니어 개발자 시절의 내 무기는 '직접적인 해결 능력'이었다. 버그를 잡아내고, 성능을 튜닝하고, 라이브 장애를 빠르게 수습하는 실무 컨트리뷰션. 하지만 팀장의 무기는 개별 코드가 아니라 팀원들이 안정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시스템과 환경' 그 자체여야 한다.

  • 배포 프로세스를 모른다는 것: 팀원들이 나 없이도 배포를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을 만큼 시스템과 절차를 자동화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조직을 구축했다는 방증이다.
  • 내가 짤 코드가 없다는 것: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지 않고 팀원들에게 적절한 권한 위임(Delegation)과 성장 기회를 주었다는 뜻이다.

이슈 대처가 힘들까 봐 불안했던 이유는 내가 직접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지만, 역설적으로 팀장이 해야 할 일은 직접 코드를 고치는 게 아니라, 이슈가 터졌을 때 팀원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리스크를 관리하고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일이다.

자판기 음료수의 무게

생각해 보면 어제 새벽, 긴장감 도는 배포 현장에서 팀원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내 어설픈 훈수나 키보드를 뺏어 쥐는 참견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집중력을 깨지 않으면서도, "내가 뒤에 있으니 걱정 말고 하라"는 묵직한 지지와 신뢰의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뽑아온 자판기 음료수는 단순한 캔커피가 아니라, 팀원들이 마음 놓고 실무를 주도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주는 리더의 작은 배려이자 서번트 리더십의 발현이었을 테다.

실무 코드에서 멀어지는 것은 시니어 개발자에게 언제나 서글프고 불안한 일이다. 평생을 증명해 온 내 무기를 내려놓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내 역할은 더 이상 필드 위를 뛰어다니는 선수가 아니다. 새벽 배포 현장에서 묵묵히 자판기 음료수를 뽑아 나르는 일, 팀원들이 만든 결과물이 세상에 안전하게 나갈 수 있도록 뒤에서 리스크를 가늠하는 일.

나는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진짜 '팀장'이 되어가는 중이다. 조금은 쓸쓸하지만, 이 묵직한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